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1932년 4월 4일, 자브라이예에서 태어났다. 그의 아버지 아르세니 타르콥스키 감독은 소련의 유명한 시인이며 모스크바 대학 교수였고, 그의 어머니 마리아 이바노브나 비슈나코바는 인쇄소 교정공이었다. 불행히도 1936년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갔고, 타르콥스키 감독은 그의 여동생 마리아와 함께 유년기를 보냈다. 이 시절, 그의 어머니는 [[레프 톨스토이]]의 책을 자주 읽어주셨다고 한다. 그는 여기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학교를 다녔고, 음악학교 과정도 함께 이수하였다. 3년간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고, 동양어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하기도 하였다. 여기서 일본어에 특히 관심을 가졌으며, 고대 일본 시 양식인 [[하이쿠]]를 즐겨 읽었다. 그의 졸업 성적은 보통 수준이었으나, 문학과 음악에서만큼은 두각을 나타냈다.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시베리아에서 지질학을 공부했다. 그는 이 시기가 자신의 `단련의 시간'이었으며, 이때 `관찰의 훈련'을 쌓았다고 말한다. 1956년, 국립영화학교 VGIK 에 입학했으며, 1961년, 〈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〉을 졸업작품으로 낸다. 1962년, 첫 장편 데뷔작인 〈[[이반의 어린 시절]]〉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면서 소련 영화계의 주목 받는 신인감독이 되었으나, 〈[[안드레이 루블료프(영화)|안드레이 루블료프]]〉를 기점으로 소련 당국으로부터 '[[자본주의]]적이고 [[반동주의|반동적인]] 예술성향을 가졌다'고 비판 받기 시작하며, 향후 활동에 큰 차질을 겪었다. (※ 자본주의 시장에선 기획 하나가 무산되면 다른 회사를 찾아다녀서라도 영화를 만들 수 있지만, 공산권에서는 영화 투자를 __모두 정부에서 단독 승인__하므로, 기획 자체를 엎어버리거나, 이미 엎어진 기획을 몇 년 뒤에 갑자기 승인하는 방식으로 영화 제작을 방해할 수 있었다) 이로 인해 타르콥스키는 감독 생활 대부분을 사실상 실업자 신세로 살았는데, 타르콥스키의 일기장을 출간한 책 《타르코프스키의 순교 일기》를 보면 당시 그의 괴로움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.[* '[[러시아 영화]]' 문서를 봐도 알겠지만, 당시 소련 영화계는 [[할리우드]]에 맞먹을 정도로 흥행과 비평 모두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. 이럴 때 소련 당국이 직접 나서서 타르콥스키만 유독 괴롭혔으니 더더욱 억울하게 느꼈을 법하다.] >'''1970년 9월 7일''' >좋은 시절이라면 나도 백만장자가 될 수 있을 텐데! 내가 만일 일 년에 영화 두 편씩을 찍을 수 있다면 1960년대부터 시작해서 이미 20편을 찍었을 것이다. 바보 같은 놈들이 결재를 하고 있는 판에 무슨 영화를 찍을 수 있단 말인가! {{{-2 (p.41)}}} >---- >'''1972년 2월 15일''' >나는 지쳤다. 4월이면 마흔 살이 된다. 이 나이에 접어들면서도 내 인생에는 안정과 평화가 없다. [[알렉산드르 푸시킨|푸시킨]]은 자유는 누리지 못했어도 그 대신 최소한 유토피아와 내적인 평화는 누렸었는데 나에게는 그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! {{{-2 (p.87)}}} >---- >'''1973년 1월 27일''' >요즘같이 산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! 국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해나갈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부럽다. 영화와 연극 부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부럽다. 돈으로 주는 보수에 대해서도 역시 말하고 싶지 않다. 최소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란 점이 부러울 뿐이다. {{{-2 (중략)}}}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일하는 것뿐이다. 더 이상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. 일! 작업! 이탈리아 언론으로부터 천재감독이라고 격찬을 받은 일이 있는데, 그가 일거리 없이 빈둥대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그로테스크하지 않은가? 솔직히 말해서 이런 현상은 권력을 잡은 중간치기들의 복수라고밖에는 볼 수 없다. 이 평범한 중간치기들은 예술가를 증오하며, 우리 소련의 지도층은 예외없이 이런 중간치기들로 구성되어 있다. {{{-2 (p.99)}}} >---- >'''1973년 1월 29일''' >아! 나와 5년 계약을 맺고자 하는 누군가를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! 5년 동안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마음껏,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가져 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! 그렇게만 된다면 난 한 순간도 허비하지 않고 일곱 편의 영화는 확실히 만들어낼 수 있을 텐데. {{{-2 (p.101)}}} >---- >'''1973년 10월 20일''' >불길한 생각들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;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. 나는 우리 문화에 낯설기 그지없다. 나는 우리 문화에 아무런 기여도 한 바 없다. 나는 가련한 무용지물이다. 그러나 유럽 또는 기타 나라에서 누가 소련 최고의 영화감독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면 모두들 타르콥스키라고 한다는데, 우리나라에서는 모두들 입을 다물고만 있다. 나라는 존재는 도대체가 없는 것이다. 한 점 얼룩에 불과할 뿐이다... {{{-2 (p.113)}}} >---- >''《타르코프스키의 순교 일기》 김창우 역, 1997, 두레'' 지속적인 소련 당국의 압박과 그로 인한 생활고에 견디지 못한 타르콥스키는 결국 1984년, 소련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기자회견과 함께, 아내와 아들들을 남겨두고 서방으로 망명하였다. 1985년, [[암]] 판정을 받은 타르콥스키 감독은 1986년 파리에서 사망하게 된다.[* 여기에 대해서는 한때 소련 당국이 암살한 게 아니냐는 음모론이 있었다. 한편으로는, 〈[[스토커(러시아 영화)|스토커]]〉에 스태프로 참여했던 부인과 배우가 같은 [[폐암]]으로 사망했다는 점 때문에, 〈[[스토커(러시아 영화)|스토커]]〉를 촬영했던 장소 근처의 공장 탓이 아니겠느냐는 설도 있다.] 생이별해야 했던 아들과는, 다행히도 소련 당국의 허가를 받아 투병생활 중이던 1986년 재회하였다.[* 다큐멘터리 〈안드레이 아르세니예비치의 어떤 하루〉에 아들과 만나는 당시 모습이 담겨 있다.] 유작이 된 〈[[희생(영화)|희생]]〉이 칸 영화제에서 수상할 때에는 아들이 대리수상 했다.[* 당시, [[롤랑 조페]] 감독의 가편집 상영작 "미션"이 황금종려상을 받아 논란이었다.] 장례식은 파리에 위치한 [[정교회]] [[성당]]에서 치뤄졌으며, [[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]]가 참석해 평소 좋아했던 바하의 무반주 첼로를 연주했다고 한다. [[로베르 브레송]]과 [[크리스 마르케]]도 참석했으며 [[알렉산드르 솔제니친]]도 왔다고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